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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즈 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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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미즈 알리아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알바니아를 통치한 정치인이다. 그는 1961년 알바니아 노동당 정치국 국원이 되었고, 1982년에는 국가 원수 자리에 올랐다. 엔베르 호자의 뒤를 이어 알바니아 노동당 서기장이 된 알리아는 경제 개혁과 제한적인 정치적 자유화를 추진했지만, 1990년대 초 민주화 시위와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1991년 알바니아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1992년 총선 패배 후 사임했다. 이후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2011년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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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즈 알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미즈 알리아 초상화, 1985년
공식 초상화, 1985년
서명
출생일1925년 10월 18일
출생지슈코더르, 제1 알바니아 공화국
사망일2011년 10월 7일
사망지티라나, 알바니아
배우자세미라미스 슈바니 (1986년 사망)
자녀자나, 베사, 아르벤
소속 정당알바니아 노동당(1943년–1991년)
알바니아 사회당(1991년–2011년)
정치 경력
직책알바니아 대통령
임기 시작1991년 4월 30일
임기 종료1992년 4월 3일
총리파토스 나노
일리 부피
빌손 아흐메티
이전본인 (인민 의회 의장)
이후살리 베리샤
직책알바니아 인민 의회 간부 회의 의장
임기 시작1982년 11월 22일
임기 종료1991년 4월 30일
지도자엔베르 호자 (제1 서기)
이전하지 레시
이후본인 (대통령)
직책알바니아 노동당 제1 서기
임기 시작1985년 4월 13일
임기 종료1991년 6월 13일
이전엔베르 호자
이후직책 폐지

2. 인물과 경력

10대 후반에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호자의 신임을 얻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1961년 알바니아 노동당(APL) 정치국원이 되었고, 1982년에는 하지 레시의 뒤를 이어 명목상 국가 원수인 인민의회 간부회 의장직에 올랐다.

호자는 여러 이유로 알리아를 후계자로 선택했는데, 알리아는 오랫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추종자였고 호자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호자의 아내 네지미에의 호감을 얻었다. 또한 호자와 유사한 정치적 경험 및 견해를 공유했고, 전체주의 체제에 순응했으며 여러 숙청에서 살아남은 정치적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1985년, 호자 사후 알리아가 노동당 제1서기로 정권을 승계했을 때 알바니아는 정치적 무관심, 경제난, 사회 통제 약화 등 심각한 위기 상태였다. 알리아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경제 효율성 개선, 검열 완화, 인권 문제 일부 개선, 외교 관계 확대 등 신중한 개혁을 시도했다. 1986년1989년에는 사면을 통해 장기 수감자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당내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기존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꺼리는 태도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다. 1980년대 말부터 개혁 요구가 거세졌고, 특히 1990년 12월 티라나 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민주화 요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알리아는 복수정당제를 수용하고, 1991년 알바니아 노동당알바니아 사회당으로 개편했다. 같은 해 대통령직이 신설되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계속되는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1992년 총선에서 알바니아 민주당(ADP)이 압승하자 4월 3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살리 베리샤가 선출되었다.

대통령 사임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이후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기도 했다. 2011년 10월 7일, 폐 질환으로 티라나의 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및 정치 경력

1950년의 알리아


알리아는 1925년 10월 18일,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에서 게그 알바니아인 무슬림 부모에게서 태어났다.[2] 그의 부모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알바니아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3][4][5] 그는 수도 티라나에서 성장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하의 청년 단체인 '파시스트 릭토르 청년 조직'의 일원이었으나, 1941년 비밀리에 활동하던 알바니아 공산주의 청년 조직에 가입하며 노선을 변경했다.[6][7] 1943년에는 알바니아 공산당 (이후 알바니아 노동당으로 개칭)의 정식 당원이 되었다.[7]

알리아는 엔베르 호자의 후원을 받으며 당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져나갔다. 20세가 되기 전에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그는[2] 1948년 알바니아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6년에는 최고 권력 기구인 정치국의 후보 위원으로 지명되었다.[8] 마침내 1961년에는 정치국 정식 위원이 되어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는 특히 알바니아의 문화 및 이념 혁명 시기에 당의 사회 및 문화 정책을 담당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스트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9]

엔베르 호자는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상 알리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자는 자신의 의사 중 한 명에게 알리아를 소개하며 "내 친구, 나는 늙어가고 건강도 최고가 아니오. 이 친구[알리아]와 같은 젊은 동지들이 나설 것이오."라고 말하며 신뢰를 나타내기도 했다.[10] 호자가 알리아를 선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알리아는 오랫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추종자였으며 호자의 정책을 충실히 지지했다. 또한 호자의 아내인 네지미에의 호감을 얻은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의 정치적 경험은 호자와 유사했고, 대외 및 국내 정책에 대한 견해도 공유했으며,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차례의 당내 숙청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의 뛰어난 정치적 생존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982년, 알리아는 하지 레시의 뒤를 이어 알바니아의 명목상 국가 원수인 인민의회 간부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그가 호자 사후 최고 권력을 승계할 유력한 인물임을 공식화한 조치로 평가된다.

2. 2. 알바니아 노동당 서기장

엔베르 호자 사후 1985년 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로 알리아가 정권을 승계했을 때, 알바니아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가 만연했고, 많은 국민이 정부의 가치를 불신했다. 낮은 식량 생산과 상시적인 물자 부족으로 경제는 침체 상태였으며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회 통제는 약화되고 관료 조직은 부패했으며, 지식인들은 당의 엄격한 통치에 저항하며 정부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6]

호자가 알리아를 후계자로 선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알리아는 오랫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추종자였고 호자의 정책을 지지했으며, 호자의 아내 네지미에 호자의 신임도 얻었다. 알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호자와 유사했고, 국내외 정책에 대한 견해를 공유했으며 전체주의 체제에 순응했다. 여러 차례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의 정치적 능력과 생존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알리아는 알바니아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회 시스템 변화를 조심스럽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경제 효율성 개선을 목표로 특정 부문에서 가격 개혁과 경제 분권화를 시도했지만, 이는 호자가 구축한 시스템에서 일부 벗어나는 것일 뿐 근본적인 경제 개혁은 아니었다. 검열 정책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사회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허용하고 작가와 예술가들이 문화 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도록 했다.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거세지자, 알리아는 일부 정치적 통제를 완화하고 대규모 규제를 폐지했다. 1986년1989년에는 전면적인 사면을 단행하여 많은 장기 수감자를 석방했다. 외교적으로는 고립 정책에서 벗어나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개선했다. 여행 및 관광 제한 완화는 알바니아 관광 산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알리아의 개혁은 여러 한계에 부딪혔다. 기득권을 가진 당 관료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개혁에 저항했다. 알리아 자신도 호자의 유산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1988년 스칸데르베그 광장에서 열린 호자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그는 여전히 호자를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르침, 혁명과 사회주의의 이상을 옹호한 유일한 이름"이라고 칭송하며[11], 기존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 특히 청년층의 요구는 점점 커져갔다. 1990년 12월 9일, 수도 티라나의 엔베르 호자 대학교(현 티라나 대학교) 학생들이 독재 정치 종식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12월 11일경 약 3,000명으로 늘어났고 기동대와 충돌했다. 알리아는 학생 대표들을 만나 민주화를 위한 추가 조치를 약속했지만, 상황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같은 해 말, 경제난 등으로 인해 약 5,000명의 알바니아인, 특히 젊은이들이 국경을 넘어 그리스 등으로 탈출하며 난민이 되었다.

2. 3. 다당제 도입, 대통령 취임

알리아의 개혁 노력은 제한적이고 신중하게 이루어졌지만, 알바니아 청년층의 요구가 커지면서 아래로부터의 개혁 압력에 직면했다. 1990년 12월 9일, 티라나 대학교(당시 엔베르 호자 대학교) 학생들은 수도 티라나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고, 독재 정치 종식과 개혁을 요구했다. 12월 11일에는 시위 참가자가 약 3,000명으로 늘어났고, 기동대와의 충돌도 발생했다. 학생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알리아는 학생들과 직접 만나 민주화를 위한 추가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학생들은 독립적인 정치 조직 결성을 요구했고, 알리아는 법무부 등록을 조건으로 이를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12]

결국 1990년 12월 12일, 알리아는 복수 정당제를 허용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3] 알리아는 1991년 신년 메시지를 통해 변화를 환영하며 경제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국외로 떠나려 했다. 특히 경제 불황으로 젊은 층의 난민 발생이 두드러졌다.

1991년, 대중의 저항 속에 알바니아는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알리아는 기존의 알바니아 노동당알바니아 사회당으로 개명했다. 같은 해 열린 1991년 알바니아 총선에서 알리아는 수도의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새로 창당된 알바니아 민주당(ADP) 후보로 나선 무명의 광산 기술자 프랑코 크로키에게 61%의 득표율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아는 민주화된 알바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반공산주의 야당 세력의 부상을 도우며 평화로운 정치적 전환에 기여했고, 이를 통해 유혈 사태를 막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 위기는 계속되었고, 이는 알리아 정권이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결국 1992년 봄 총선에서 알바니아 민주당(ADP)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알리아는 1992년 4월 3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6] 4월 9일, 인민 의회는 알바니아 민주당의 지도자인 살리 베리샤를 새로운 국가 원수로 선출했다. 알리아는 대통령 사임과 함께 정계에서 은퇴했다.

2. 4. 은퇴 이후

1992년 4월 3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후, 알리아는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1992년 8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1993년 8월에는 구금 상태로 전환되었다.[6]

1994년 5월 21일, 알리아를 포함한 이전 공산 정부의 고위 관리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알리아는 권력 남용과 국고 횡령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아딜 차르차니 전 총리, 마누쉬 미프티우 전 부총리, 리타 마르코 전 부통령 역시 같은 혐의를 받았다. 알리아는 법정에서 자신이 정치적인 공개 재판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며 재판의 텔레비전 생중계를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 재판은 휴먼 라이츠 워치 대표가 참관했으며, 약간의 적법 절차 위반이 지적되기도 했다. 알리아는 유죄 판결을 받아 9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 법원에서 형량이 5년으로 감형되었고, 알리아를 포함한 일부 피고인들에게 국가에 대한 변제 명령이 내려졌다. 1995년 11월 30일, 대법원은 알리아의 형량을 3년 더 감형했다. 1995년 7월 7일, 라미즈 알리아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3월, 그는 임기 중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은 1997년 2월 18일에 시작되었지만, 1997년 알바니아 소요 사태가 발생하고 교도소 경비병들이 탈주하는 혼란 속에서 알리아 역시 감옥에서 탈출했다.[14] 소요 사태 와중에 그는 국영 TV에 출연하여 블렌디 페브지우와 독점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997년 12월, 알리아는 소요 사태 동안 가족과 합류하기 위해 잠시 프랑스로 피신했다가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왔다.[15]

2000년대 후반, 알리아는 인터뷰를 하거나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 두바이에서 알바니아로 여행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16] 그는 86번째 생일을 11일 앞둔 2011년 10월 7일, 알바니아 티라나의 한 병원에서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5세였다.[17]

3. 평가

엔베르 호자 사후 알바니아를 이끈 라미즈 알리아는 폐쇄적인 공산주의 국가였던 알바니아를 개혁하고 민주화로 이행시키는 과도기를 관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 그는 엔베르 호자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알바니아 노동당 내에서 입지를 다졌고, 호자 사후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2]

알리아가 집권했을 당시 알바니아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만연했고, 낮은 생산성과 물자 부족으로 경제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등 위기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3] 그는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경제 효율성 증대를 위한 부분적인 가격 개혁과 경제 집중 완화, 검열 완화, 사회 문제 공론화 허용, 사면을 통한 정치범 석방,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유고슬라비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 및 여행 제한 완화 등 점진적인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3][4]

특히 1990년 12월, 티라나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생했을 때, 알리아는 무력 진압 대신 학생들과의 면담을 통해 다당제 도입 등 추가적인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며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길을 열었다.[5] 이러한 대응은 알바니아가 구 동구권 국가들 중 비교적 유혈 사태 없이 체제 전환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 그의 정치적 생존 능력은 상황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처 능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6]

그러나 알리아의 개혁은 엔베르 호자가 구축한 체제의 근본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당내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 또한 심각한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해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그리스 등으로 탈출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7] 알리아 자신도 엔베르 호자 정권 하에서 알바니아 노동당 정치국원, 국가 원수 등을 역임하며 전체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과거 권력 남용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실제로 퇴임 후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2][8] 보수 진영에서는 알리아를 공산주의 독재 체제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로 간주하며, 그의 개혁이 시대적 흐름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 자발적인 의지는 아니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1]

종합적으로 라미즈 알리아는 경직된 독재 체제를 물려받아 국가적 혼란기에 안정을 도모하고 민주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지만, 개혁의 한계와 과거 정권과의 연관성 등으로 인해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4. 유산

엔베르 호자 사후 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가 된 라미즈 알리아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 만성적인 물자 부족과 경제난, 경직된 사회 통제 등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알바니아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국내외적 어려움을 인식하고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신중하게 사회 시스템 변화를 시도했다.

알리아는 우선 경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 분야에서 가격 개혁과 경제 집중 완화를 추진했다. 이는 호자 시대의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시도였지만,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검열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으나, 사회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일부 허용하고 작가와 예술가들의 문화적 토론을 장려했다. 또한 국제 사회의 인권 문제 비판에 대응하여 일부 정치적 통제를 완화하고, 1986년과 1989년 두 차례의 사면을 통해 많은 장기 수감자를 석방했다. 외교적으로는 고립에서 벗어나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유고슬라비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여행 및 관광 제한을 완화했다.

그러나 알리아의 신중하고 제한적인 개혁은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당내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특권 상실을 우려하여 개혁에 저항했으며, 사회 시스템의 억압적인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편, 알리아의 개혁은 오히려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켜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를 촉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 12월, 티라나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재 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알리아는 학생 대표들과 만나 민주화를 위한 추가 조치를 약속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후 알리아는 정치적 생존을 모색하며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1991년에는 알바니아 노동당알바니아 사회당으로 개편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대통령직에 취임하여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심화되는 경제난과 국외로 탈출하는 난민 문제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1992년 봄에 실시된 총선에서 알바니아 민주당(ADP)이 압승하자, 알리아는 같은 해 4월 3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고, ADP의 살리 베리샤가 새로운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다.

알리아는 알바니아가 억압적인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개혁은 알바니아 사회에 일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많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야기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정계 은퇴 후에는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1년 10월 7일, 폐 질환으로 티라나의 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저서


  • 알리아, 라미즈. ''나의 삶: 회고록'', 티라나, 토에나: 2010

참조

[1] 뉴스 Semiramis Alia Is Dead a 58; Wife of the Albanian Leader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86-03-15
[2] 서적 The Elections in Albania: March-April 1991 https://books.google[...] The Commission 1991
[3] 뉴스 ramiz-alia-former-ruler-of-albania-dies-at-85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0-05-14
[4] 웹사이트 Ramiz Alia http://president.al/[...] 2020-02-16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entral and Eastern Europe in the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7-08
[6] 웹사이트 Ramiz Alia Facts https://biography.yo[...]
[7] 간행물 Background Notes to Albania's Party Congress – Special Report http://www.osaarchiv[...] 1961-02-02
[8] 서적 The Albanians: A Modern History I.B. Taurus 2006
[9] 서적 Socialist Albania since 1944: Domestic and Foreign Developments MIT Press
[10] 서적 Enver Hoxha: The Iron Fist of Albania http://worldcat.org/[...] I.B. Tauris
[11] 서적 Albania Today 1988
[12] Youtube Opinion - Takimi i Ramiz Alise me Studentet_Pjesa 1 (08 dhjetor 2009) https://www.youtube.[...]
[13] 웹사이트 Këto janë 50 fakte nga jeta e Ramiz Alisë dhe misteret që mori në varr https://telegrafi.co[...] 2016-02-16
[14] 뉴스 Ramiz Alia https://www.heraldsc[...] The Herald Scotland 2011-11-04
[15] 뉴스 Ramiz Alia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1-10-07
[16] 뉴스 Ish-presidenti i Shqipërisë, Ramiz Alia boton librin "Jeta Ime" http://lajme.shqiper[...] Shqiperia 2011-05-04
[17] 뉴스 Ramiz Alia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1-10-07
[18] 뉴스 R・アリア氏死去 アルバニア旧共産政権の最後の指導者 http://sankei.jp.msn[...] 産経新聞、産経デジタル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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